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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법주사

사찰소개 자연환경 역사 가람배치 문화재 인물 설화 안내
법주사의 역사
    • 553년 의신조사(義信組師)에 의해 세워진 법주사는 720년(성덕왕 19)에 중건되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의 기록을 들어 760년경 진표율사(眞表律師)와 그의 제자인 영심(永深)에 의해 다시 한 번 중창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길상사(吉祥寺)로 불린 것으로 추측되며, 이 시기 길상사는 진표율사의 가르침에 따라 미륵신앙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짐작된다. 또한 9세기 무렵에 와서는 경내에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고 많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속리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는 현재 법주사 경내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이나, 석련지(국보 제64호)와 같은 석물을 들 수 있다.

    • 법주사 전경 법주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고려시대 법주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더욱 발전해 나갔는데, 『법주사사적기(俗離山大法住寺事蹟記)』에서는 여러 가지 내용을 열거해 놓고 있다. 사적기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과 일치하는 점이 많아서 법주사의 역사를 살피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고려사』에서는 일관되게 절 이름을 속리사도 기록하고 있어 고려시대에 법주사는 속리사로 불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적기의 내용에 따르면 법주사 철당간이 처음 생긴 것은 1006년(고려 목종 9)의 일이라고 하는데, 지금 있는 당간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으로 철거되었다가 후에 다시 세워진 것이며 당간지주만이 고려시대 것으로 전한다. 고려시대 법주사는 특히 문종의 5째 아들이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동생이기도 한 도생승통(導生僧統)이 법주사에 머물던 시기에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忠烈王), 충숙왕(忠肅王), 공민왕(恭愍王) 등 여러 왕들이 절에 행차하기도 하였고, 특히 공민왕 때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불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 사리탑이 현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는 탑이라 전해진다.
    • 법주사 쌍사자석등 법주사 쌍사자석등
    • 법주사는 조선시대 들어서도 세조(世祖)의 후원을 받는 등 왕실과 관계를 맺으며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버리는 화마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26년(인조 4) 사명대사(四溟大師)에 의해 주요 전각이 재건되었고, 1630년에 『법주사사적기』가 편찬되었다.

      그 후 영조(英祖) 때는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원당이 들어서는 등 지속적인 왕실과의 관계를 보이며, 1851년(철종 2)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872년(고종 9)에는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리고,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중단되었다가 후에 재착수 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고, 2002년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가람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표
법주사 연표
연대 내 용
553년 의신조사 창건
760년경 진표율사와 그 제자 영심 등에 의해 중창
고려 숙종 때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냄
고려 인종 때 왕이 법주사에서 점찰법회를 열고, 김부식에게 「속리사점찰법회소(俗離寺占察法會疏」를 짓게 함
고려 원종 때 자정미수(慈淨彌授)대사가 절에 주석
1281년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감
1363년 왕이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l과를 법주사에 봉안토록 함
조선 세조 때 신미대사(信眉大師)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
1592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전각이 소실
1605~26년 사명대사가 중건
1630년 「법주사사적기」를 편찬
1636~40년 벽암 각성선사(碧巖覺性禪師)가 황폐화된 절을 중창
1851년 권돈인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
1872년 2충 규모의 용화보전을 헐음(지금의 금동청동미록대불 자리)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 법주사 주지승 장석장(張石箱)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영곤(金永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金復鎭)이 요절하면서 중단
1963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미륵불상 조성 재착수하여 1년 후 완공
2002년 미륵대불 개금불사